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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도서리뷰]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freemaden 2019. 4. 26. 11:51

 

아흔일곱 번째 봄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여기 있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길이기도 하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 07p 중에서 - 

 

" 한 사람이 30년 동안 남긴 기록 "

 

이 책은 저자인 이옥남 할머니가 30년 동안 써오신 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모은 것입니다. 이옥남 할머니가 남편과 시어머니와 사별 후에 시간이 남을 때마다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간간히 적어 오셨다고 합니다. 한글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셨지만 틈나는 대로 글자 쓰기 연습을 해서 한글을 깨친 거라 하니 저도 이옥남 할머니처럼 나이 들어서도 무언가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은 할머니의 소소한 일상으로 가득합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점점 할머니의 그 순박한 마음씨에 이끌리는 기분입니다. 욕심이 넘치지 않고 소박한 생각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이 책을 읽다 보면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박하게 대했는지, 또 쓸데없는 욕심은 얼마나 많이 부렸는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큰아들은 오자마자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와서는 수동집에 잠깐 갔다가 온다더니 그 길로 바로 친구 찾아가서는 밤중에도 아니 오고 새벽 네 신지 와서 밥도 먹은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또 가고 계속 이박 삼일 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가는구나. 제가 웬만하면 일 년 만에 엄마를 만났으면 그래도 무슨 의논 한 마디쯤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나대로 섭섭했다.

 

- 25p 중에서 -

 

오늘 아침에는 작은딸 전화 받고 저녁에는 막내아들 전화받았다. 그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늘 그렇게만 살고 싶었지. 자식이 뭔지 늘 봐도 늘 보고 싶고 늘 궁금하다.

 

- 86p 중에서 -

 

" 같은 자리에서 항상 자식을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 

 

이옥남 할머니는 항상 자식들을 그리워하고 만나면 반가워하고 가버리면 서운해하십니다.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에는 자식들을 생각하는 구절이 상당 부분 많았는데 저도 읽으면서 특히 제 어머니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제 어머니도 항상 전화로 제 안부를 물어보시고 걱정하고 또 제가 오면 반갑게 저를 맞아주십니다. 그러다 제가 사는 자취집으로 돌아가야 되면 어머니의 얼굴에 쓸쓸함과 서운함이 묻어 나오고 저는 다음 주에도 올 거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저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 넓고 고독한 세상에 조금은 저를 덜 외롭게 만듭니다. 항상 저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제 마음의 안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제가 없으면 서운해할 사람이 있다는 게 제가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줘서 책임감을 가지게 됩니다.

 

 

 

 

작년에 감자가 하도 썩어서 속상해서 이제는 다시 안 심는다고 맹세를 해놓고 감자씨를 청구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또 봄이 되니 남들 심으면 부러울까 봐 집에 있는 감자를 그냥 심어놓았다. 그저 잘 올라오면 정성껏 잘 매 가꾸고 바라볼 뿐이지. 잘 되면 고맙고 안 되도 할 수 없는 거고.

 

- 47p, 48p 중에서 -

 

 

" 잘 되면 고맙고 안 되도 할 수 없는 거고 " 

 

위의 저 말은 할머니가 평소 일을 하실 때 그 일을 대하는 할머니의 생각입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는  저런 생각으로는 어중간한 결과물 밖에 내놓지 못한다고 질타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저런 태도와 생각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조물주인 신도 아니고 항상 제 맘대로 세상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각은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은 일적으로나 개인적인 일상으로나 맘 같지 않을 때 스스로나 타인을 많이 괴롭히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 일은 사람이 하고 결과는 하늘이 낸다 ' , ' 잘 되면 고맙고 안 돼도 할 수 없는 거고' 이미 내려진 결과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좀 더 좋겠습니다. 물론 당연히 결과와는 별도로 과정만은 최선을 다해야겠지만요. 

 

 

 

 

" 아흔일곱번의 봄여름가을겨울 "

 

책 제목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사계절을 보내게 될까' 한 번도 사계절의 개념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책을 보면서 한번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런 관점으로 보니 또 지금 보고 있는 벚꽃이, 지금 내리고 있는 첫눈이, 구슬구슬하게 내리는 비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은 신기한 느낌이었습니다. 

 

" 뭣이 중헌디 "

 

 

영화 곡성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사죠. 제가 이옥남 할머니의 30년간 정성껏 쓴 일기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할머니가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자연과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금의 현대인에게는 약간은 별나라 얘기처럼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어서 자연이나 이웃,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옥남 할머니의 그런 겸허하고 여유 있는 삶의 자세가, 이웃과 자식을 생각하는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마음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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