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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1946년 대구사건

freemaden 2020. 2. 19. 03:39

이번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946년 일제 강점기가 끝난 한반도의 대구에서 벌어진 대구사건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당시 해방 직후의 한반도는 미군정이 들어와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어설픈 통치 정책으로 한반도는 아수라장이 돼버리고 각 지역의 사람들은 시위를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의 통치를 거부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조선공산당 소속의 노동자 단체도 총파업을 진행하면서 시위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번져갑니다. 

 

대구의 노동자들도 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쌀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여성들과 아이들까지 시위에 가담하면서 사태는 심각해집니다. 대구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들은 총을 쏴대며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했고 여기에 총에 맞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노동자와 여성들로 이루어졌던 시위대가 이제는 격분한 학생들까지 가담하게 됩니다. 시위가 커지자 미군정은 장갑차까지 투입하며 계엄령을 선포했고 당시 경찰들 중 80% 이상이 친일 경찰이었기 때문에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공산당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쌀을 요구하며 시위에 가담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미군정의 쌀정책과 일제 경찰에 있었습니다. 미군정은 한반도에 자유시장을 선포하며 일제 시대에 사용하던 미곡 수집령을 폐지합니다. 더 이상 쌀을 강제로 빼앗기지 않아도 됐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 시장에 쌀 양이 부족하다 보니 쌀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시장이 비정상의 형태로 돌아가자 미군정은 일본이 사용했던 미곡 수집령을 다시 발표합니다.

 

해방 직후 미군은 친일파 경찰의 80%를 그대로 재직하게 두었기 때문에 미군이 다시 미곡 수집령을 내렸을 때 친일파 경찰들은 해방 후에도 대구의 많은 시민들의 쌀을 강제로 수탈하고 자신의 배를 배불리 채웠습니다. 여기에 쌀을 빼앗기고 콜레라라고 하는 역병까지 돌게 되자  사람들은 참다 못해 시위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존 하지라고 하는 미군정 사령관은 야전 사령관으로 전투적인 훈련만 받았을뿐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서툰 군인이었습니다. 존 하지는 조선 한반도에 사회주의 인사들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어모으는 걸 보고 위기의식을 느껴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일제 형사들을 그대로 채용합니다. 

 

결국 1946년 대구사건의 근원지는 해방후에도 친일 경찰의 횡포가 잦아들기는커녕 더 활발하게 수탈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은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해서 많은 정보와 행정력이 필요했고 인력이 부족했던 미국은 해방 직 후 생겨난 빈자리를 대부분 친일파 경찰들로 채웠습니다. 이러한 모순된 미군정의 행정이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적인 참사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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